중국문화와 문자의 발전

최고관리자
등록 14-02-04 10:02 | 조회 1,228

중국 문화의 기원에 대하여 과거에는 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있었다. 즉 일부 학자들은 중국 문화는 동·서가 이원적으로 대립하여 발전하였다고 생각하였으며, 일부는 중원의 문화를 핵심으로 해서 사방으로 확산, 발전해 나갔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재에 와서는, 대체적으로 중국 초기의 문화는 지역적으로 발전해 왔다는 데에 모두 동의하고 있다. 구석기 시대의 문화 유적들은 거의 남북 각 지역에 분포하고 있으나, 신석기 시대는 중원 지역 외에도 장강 하류, 태호(太湖) 연안, 동북, 감숙, 청해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이 곳들은 각각 지방 문화의 특색을 갖추면서 발전하였다.

중국 농업 문명은 이른바 황토(黃土) 구역과 강한(江漢) 유역의 기후와 지리적 차이 때문에 밀과 벼를 생산하는 서로 다른 문화를 만들어 내었다. 황토 구역은 식물이 잘 자라지 못하는 건조한 기후인데도 황토 질이 비옥하여 경작이 쉬운 까닭에, 비가 집중적으로 내리는 여름철을 이용하여 밀을 경작하였고, 반대로 강한 유역은 강우량이 비교적 많았기 때문에 열대 기후에 적당한 벼를 경작하였다.

지금부터 6,000~7,000년 전 황하 중상류에 사람들이 정착하여 농경 생활을 하였는데, 이른바 '앙소문화(仰韶文化)'가 그것이다. 섬서성(陝西省) 서안시(西安市) 반파촌(半坡村)의 앙소문화의 한 유적은 이미 큰 촌락을 형성하여 생활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여기서 여러 종류의 생산 도구가 출토되었는데, 돌도끼, 돌낫, 절구, 맷돌 등을 비롯한 골기(骨器)들로 그 제작이 상당히 정교하다. 또, 채소를 심고 개, 돼지 등을 사육하였으며,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는 것 이외에 마직옷을 입기도 하였다. 도기는 일상 생활에 필요한 것으로 홍색, 홍갈색이 위주였는데, 거기에는 흑색, 홍색, 또는 백색으로 된 동·식물의 형상과 도안이 그려져 있어서 앙소문화를 '채도문화(彩陶文化)'라고 하기도 한다.

그 뒤를 이어서 약 4,500년 전 황하 중하류에 '용산문화(龍山文化)'가 출현하였다. 이 때에는 전보다 한 걸음 더 발전하여 보편적으로 마제 석기를 사용하였고, 나무 자루로 된 돌낫을 비롯하여 땅을 파는 공구도 새로이 사용하게 되었다. 가축의 양육도 좀더 발전하여 돼지, 개 이외에 소, 양, 닭, 말 등을 길렀다. 게다가 우물을 파서 사용할 줄 알게 되었고, 하안으로부터 비교적 먼 곳에 거주함으로써 주거의 범위가 점차 확대되었다. 도기 제조의 기술도 발달하여 회도(灰陶), 흑도(黑陶) 등을 주로 사용하여 용산문화를 '흑도문화(黑陶文化)'라고 일컫기도 한다. 이렇게 문화의 발전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촌락이 형성되어 사회 생활이 발전하게 됨에 따라 자연적으로 필요하게 된 것이 언어와 문자였다.

그러면 중국 문자는 언제, 어떻게 발생하였으며, 발전되어 왔는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간단하지 않지만 전혀 해결의 실마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문헌에서 전하는 전설을 살펴보면 결승(結繩)과 팔괘설(八卦說)이 있다. 결승의 방법은 사안이 클 경우에는 매듭을 크게 하고 사안이 작은 경우에는 매듭을 작게 한다. 결승은 아마도 수렵 문화에서 농업 문화로 전이되는 초기 문화 단계의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팔괘(八卦)의 경우, 그 형성이 문자 이전인지 또는 문자 이후인지에 대한 확실한 기록이 없으나 자연 사물을 관찰하여 팔괘를 만들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팔괘를 보면 새, 짐승, 자연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단지 두 가닥의 평행선에 불과한 기호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팔괘를 통해 우주 질서와 의미를 이해한다는 역학적인 접근은, 문자의 발전이라는 과학적 현상과는 구분해야 할 것이다.

또 창힐(倉呂)이 문자를 독창적으로 창조했다는 설도 많이 알려져 있지만, 이는 신빙성이 없다. 다만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문자를 다루었으나 창힐의 것이 당시 사회에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음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면 중국 문자의 시원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도화(圖畵)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의 도화의 의미는 고대 이집트 문화, 인디언 또는 에스키모 문화 속에 나타나고 있는 것과는 다르다. 즉 도화 문자와 도화는 구별되어야 한다. 도화 문자는 민족 언어와 연계성을 지닌 도안이며, 도화는 단순히 사물의 형상을 통한 객관적 사물의 인지 작업에 불과한 것이다.


중국 석기 시대의 문화 분포
중국 신석기 시대의 앙소문화의 도기 위에는 그림에 가까운 동물 문양들이 많다. 단순한 필체로 표현된 이 도화들은 언뜻 보기에 다른 원시 문화권의 그림과 유사해 보이지만 이들은 모두 중국 문자의 원시, 즉 갑골문자의 전신으로 이해되고 있다.

앙소문화 이후 산동 일대의 구릉과 평원 지역에는 대문구(大汶口)문화가 발전하였다. 이 때는 원시적이나마 한자의 구성 법칙을 엿볼 수 있는 문자 형태를 찾아볼 수 있다. 뒤 그림에 보이는 것처럼 대문구 문화 후기 유적에서 출토된 회색 토기 위에 문자가 기록되어 있는데, 상형문(象形文)과 회의(會意)에 가까운 문자들이다.

이들 문자들은 중국 문자의 일원화된 궤도를 따라 발전되고 있는 원시 문자들로, 상대(商代)의 갑골문과 금문에서 동일한 구조를 가진 유사 형태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이들 문자들은 회화성이 두드러지며, 부족을 상징하는 방명(方名 = 상대의 지역 명칭)들과 더욱 밀접한 관계를 보여 주고 있다.

상대의 갑골문과 금문에는 다량의 상형문을 포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 문자 발전의 병목 현상을 효과적으로 해결했던 회의와 형성 문자도 다수 존재하고 있다. 전체 갑골문을 100%로 보았을 때 상형(象形)은 약 23%, 지사(指事)는 약 1.7%, 회의(會意)는 약 33%, 형성(形聲)은 약 28%, 가차(假借)는 약 11%, 전주(轉注)는 0%의 비율을 보이고 있다.

당시의 상황을 대문구(大汶口)문화의 도문(陶文)과 비교해 보면, 더욱 분명하게 갑골문이 문자의 초급 단계를 훨씬 넘어섰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즉, 당시 사람들은 중국 문자의 대량 생산에 필요한 방법을 이미 갖추었으며, 한어(漢語)에 필요한 기본적인 어휘도 만족시키는 등 당시의 언어를 자유롭게 기록하였다. 하지만 갑골문은 문자로서의 기본 조건을 구비하기는 했으나, 여전히 도화적인 성격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였다. 특히, 이러한 현상들은 동물들의 상형문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으며, 어떠한 경우에는 대문구(大汶口)의 도화들과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원시적인 형태를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갑골문이나 금문이 의미와 음을 나타내는 부호라는 측면에서 도기의 문양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도화가 인간의 시각적인 측면에서 각각 독립된 물상을 반영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갑골문과 금문은 대문구의 도형과는 달리 상대 사회가 공인하는 일정한 의미와 통용되는 음을 대표하고 있다.

이들 상형문들은 상대 문자 속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자연계의 구체적인 형태의 특징을 도형으로 그려 낼 수 있는 것들을 모두 상형의 대상으로 하였다. 예를 들면 동·식물은 물론 인체의 기관과 지체 등이 모두 상형의 대상이 되었으며, 생활 용구 등 거의 모든 사물들이 상형의 방법으로 문자화되어 갔다. 또, 회의(會意)의 범주에 드는 문자들 중에는 구성상 상형성을 강하게 지니고 있는 것들이 많았다. 그 후 사회가 발전하면서 문자의 사용 범위와 이용률이 증가함에 따라, 중국 문자는 차차 도화적 성격을 벗어나 보다 간단한 부호로 발전해 갔다.

[네이버 지식백과] 중국문화와 문자의 발전 [中國文化-文字-發展]
 (역사 따라 배우는 중국문학사, 2010.3.24, 다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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